요시다 쇼인과 역사의 숨결, 주시 공원

덴마초 감옥터와 근대 일본 지사의 최후를 기리는 도심 속 조용한 추모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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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번잡함 속, 주오구 니혼바시 고덴마초의 한 구석에, 시간의 흐름을 넘어 고요함을 간직한 장소가 있다. 그곳은 한때의 덴마초 감옥터, 지금은 주시 공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은 막말의 지사, 요시다 쇼인이 최후를 맞이한 장소로서, 역사의 무게를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공원 입구를 지나면, 도시의 소음이 멀어지고, 고요함과 푸르름이 맞이해준다. 나무들 사이를 지나면, 조용히 서 있는 석비가 눈에 들어온다. 그 비석에는 쇼인의 임종 시의 시구가 새겨져 있다. “몸은 비록 무사의 들판에 썩더라도, 남겨두고 싶다 대화혼.” 이 말에서는 그의 흔들림 없는 신념과 조국에 대한 깊은 애정이 전해진다.

요시다 쇼인은 1830년, 조슈 하기의 마쓰모토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힘쓰고, 야마가류 병학을 익혀 많은 문하생을 길렀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고, 해외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1854년, 흑선 내항 시 밀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시모다에서 체포되었다. 그 후 덴마초 감옥에 보내져 약 6개월간 수감되었다. 이때 그는 다카나와 센가쿠지 앞에서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대화혼”이라고 읊었다. 이 노래에서는 그의 결의와 조국에 대한 마음이 느껴진다.

석방 후 고향 하기로 돌아가 쇼카손주쿠에서 많은 지사를 길렀다.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도 다카요시 등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도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안세이의 대옥에 연루되어 다시 덴마초 감옥에 수감된다. 1859년 10월 27일, 30세의 젊은 나이에 처형되었다. 처형 직전 그는 “지금 나는 나라를 위해 죽는다. 죽어도 임금과 부모에게 등지지 않는다. 유유자적한 천지의 일, 거울처럼 밝은 신에게 있다”고 읊으며 조용히 최후를 맞이했다.

현재 주시 공원 내에는 쇼인의 임종 시의 시구가 새겨진 석비와 그의 생애를 전하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공원 안에는 한때의 감옥터 우물터도 남아 있어 당시의 자취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공원의 한 구석에는 “시간의 종”이 있어, 에도 시대부터 시간을 알렸던 그 소리는 지금도 변함없이 울리고 있다.

이곳을 방문하면 쇼인의 삶과 그 정신이 조용히 마음에 울려온다. 도시의 소란 속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장소이다. 그의 뜻과 열정은 지금도 이 땅에 살아 숨 쉬며, 방문하는 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